BMW의 변혁을 이끈 비운의 디자이너, 클라우스 루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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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W의 변혁을 이끈 비운의 디자이너, 클라우스 루테
  • 임재현 에디터
  • 승인 2015.01.23 1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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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세단 디자인의 개념을 정립하고 BMW 디자인의 변혁을 이끈 클라우스 루테(Claus Luthe)의 퇴장은 자동차 디자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날 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클라우스 루테는 1932년 독일 서부 도시 부퍼탈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다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을 따라 건축을 전공하려고 했으나, 1948년 뷔르츠부르크의 차체 제조업체에서 수습생으로 일하게 되면서 진로가 바뀌었다. 수습기간을 마친 그는 피아트 독일법인에 합류해 오리지널 500의 전면부 디자인을 담당했다.

이후 NSU로 자리를 옮겨 디자인 부서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4년 크리스티안 슈미트가 네카르줄름에서 설립한 NSU는 훗날 아우디의 모체가 되는 아우토 우니온에 합병된다. 아우디는 아우토 우니온 독일 잉골슈타트(Auto Union Deutschland Ingolstadt)의 약자.
 

■ NSU Ro 80

루테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은 1967년에 선보인 NSU Ro 80. 펠릭스 반켈 박사가 고안한 반켈 엔진, 네 바퀴 독립 서스펜션, 반자동변속기, 디스크 브레이크 등 혁신적인 기술을 담은 4도어 세단이다.

Ro 80은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쐐기형 디자인이 특징이다. Ro 80의 공기저항계수는 0.35에 불과한데, 풍동실험을 실시하지 않은 디자인으로는 놀라운 수준. 15년 뒤인 1982년 풍동실험을 거쳐 나온 아우디 100의 공기저항계수가 0.35였다.

Ro 80의 디자인은 현대적 세단 디자인의 기본개념을 정립하며 유선형 디자인 사조의 신호탄이 됐다. Ro 80의 등장이 자동차 디자인 역사에서 획기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이유다. 세단 디자인은 Ro 80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가 있을 정도.
 

■ NSU Ro 80(위)와 아우디 A6(아래)

1967년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인 Ro 80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인해 대중의 폭넓은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점차 판매량이 늘기 시작했고, 출시 2년이 지난 시점에도 여전히 대기자 명단이 있었을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1969년 폭스바겐이 NSU를 인수해 아우토 우니온과 합병시킴에 따라 루테는 아우디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다. 그가 맡은 첫 프로젝트는 폭스바겐 폴로를 기반으로 한 아우디 50이었다. 이탈리아 디자인회사 베르토네가 최종 단계에서 디자인을 다듬기는 했지만, 아우디 50에는 루테의 흔적이 남았다. 일례로, 아우디 50의 대시보드 디자인은 Ro 80 개발 당시 NSU 이사진의 승인을 받지 못한 초기 디자인안과 매우 유사하다.

루테는 1976년 파울 바라크의 후임으로 BMW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루테가 아우디를 떠난 뒤, 그가 완성한 아우디 80 초기 디자인 시안을 토대로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디자인을 마무리했다. 루테 영입을 계기로 BMW는 이전보다 창조적이고 맵시 있는 디자인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 BMW 3시리즈(E30)

파울 바라크 시절의 BMW 디자인은 비교적 보수적인 색채를 띠고 있었다. BMW는 3시리즈부터 7시리즈에 이르는 전체 라인업의 디자인을 모두 바꾸기를 원했다. 루테는 5시리즈(E12) 부분변경 작업부터 시작했으며, 그가 개발의 모든 과정을 총괄한 첫 모델은 2세대 3시리즈(E30)다.

E30 출시 이후, 헤르베르트 콴트 당시 BMW 회장은 유럽 고급차의 기준이었던 벤츠 S클래스(W126)를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도록 디자인 팀에 지시했다. 브루노 사코가 디자인을 총괄한 W126은 매우 보수적인 디자인이었다.
 

■ BMW 7시리즈(E32)

루테는 훨씬 급진적인 시도를 했다. 늘씬한 쐐기형 디자인의 7시리즈(E32)는 어떤 면에서 Ro 80을 연상시켰으며, W126의 대척점에 있었다. 루테는 L자 모양의 테일램프로 대표되는 파격적인 E32의 디자인에 대해 우려했지만, BMW 이사회는 크게 기뻐하며 최종 양산 승인 결정을 내렸다.

그밖에 3세대 3시리즈(E36), 3세대 5시리즈(E34), 8시리즈(E31) 등이 루테가 디자인을 총괄한 모델들이다. 다소 보수적이고 권위적이었던 BMW 디자인은 루테로 인해 늘씬하고 스포티하게 바뀌어 새로운 디자인 정체성이 구축됐다.

그가 커리어의 정점에 있던 1990년 4월 성(聖) 금요일 다음날, 독일 일간지 1면에는 일제히 이런 머리기사가 실렸다.

‘BMW 수석 디자이너 클라우스 루테, 아들 살해 혐의로 체포’

당시 33세였던 클라우스 루테의 막내아들 율리히 루테는 약물 의존성 환자였다. 사건 당일 늦은 시각 그는 아버지 집에 난입해 격한 논쟁을 벌였고, 논쟁이 몸싸움으로 번지면서 아버지가 아들을 칼로 찌르는 비극이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직장동료들은 그의 가정불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사실 아들과의 불화는 오래된 것이었다. BMW는 살인 혐의로 구속된 수석 디자이너를 위해 최고의 변호인단을 구성해 회사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정상 참작된 루테는 존속살인죄로는 매우 가벼운 3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BMW는 루테가 복역하는 동안 수석 디자이너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뒀고, 그가 출소하자마자 복직을 제안했다. 그러나 루테는 제안을 고사했고, BMW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를 설득했지만 그의 결정을 바꾸지 못했다. 루테는 1990년대 말까지 BMW의 디자인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BMW 관련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은둔생활 중에도 Ro 80 동호회에는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Ro 80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 전 BMW 수석 디자이너 크리스 뱅글

1992년 10월, BMW는 클라우스 루테의 후임자를 임명했다. 크리스 뱅글이다. 당시 GM을 거쳐 피아트에 있던 크리스 뱅글이 신임 BMW 수석 디자이너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는 독일 언론의 문의가 빗발쳤다고 한다. 무명 미국인 디자이너를 수석 디자이너로 영입한 것은 그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클라우스 루테의 살인사건을 두고 자동차 디자인 역사에 나비효과를 일으킨 사건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90년에 일어난 개인적인 사건 하나가 전 세계 자동차 디자인 역사와 흐름을 바꿨다는 것.

클라우스 루테는 지난 2008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의 유력 자동차 디자인 전문매체 카디자인뉴스는 루테에 대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자동차 디자인을 이끈 인물 중 하나”라며, “시각적으로 자신감 넘치고 견고한 느낌을 주는 오늘날 독일 자동차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글 · 임재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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