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로메오 엠블럼에 담긴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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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로메오 엠블럼에 담긴 인문학
  • 임재현
  • 승인 2014.11.24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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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로메오 엠블럼에는 사람을 입에 물고 있는 뱀이 있다. 이것에 담긴 의미와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알파로메오 측에 물었다.
 

▲ 알파의 인쇄광고

1905년, 프랑스의 다라크 자동차 주식회사는 이탈리아 밀라노 인근 포르텔로에 조립공장을 건설하고 이탈리아 자동차시장에 진출했다. 그러나 품질 문제로 판매가 신통치 않자 투자자 중 한 사람인 카발리에 유고 스텔라가 1909년 말 공장을 인수했고, 이듬해 롬바르드 자동차 제작 주식회사(Anonima Lombarda Fabbrica Automobili)를 설립했다. 그것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 알파(A.L.F.A.)다.

알파로메오 역사기록보관소장 마르코 파지오(Marco Fazio) 박사는 본지와의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알파로메오의 엠블럼은 1910년에 탄생했다”며, “알파가 설립된 1910년 6월 24일로부터 몇 개월 뒤의 일이고, 알파 기술부에서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초창기 엠블럼 디자인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알파·밀라노’라고 쓰여 있는 점이 다르다.
 

▲ 니콜라 로메오(1876~1938년)

1911년부터 모터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알파는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의 여파로 경영난에 빠졌고, 1915년에 나폴리 출신 사업가 니콜라 로메오에게 인수됐다. 그는 1919년 자신의 성씨를 더한 알파-로메오(Alfa-Romeo)로 회사명을 바꿨다. 이후 ‘알파-로메오·밀라노’는 50여 년간 쓰였다. 1972년 나폴리 공장에서 생산이 시작됨에 따라 알파로메오는 엠블럼에서 ‘밀라노’를 뺐다.
 

▲ 밀라노의 시각상징물(심벌마크)

알파로메오 엠블럼 중앙 왼쪽에 자리한 흰 바탕에 빨간 십자가는 ‘성 암브로시우스의 십자가’(St. Ambrose’s Cross)로 알파로메오의 고향인 밀라노의 상징이다. 성 암브로시우스의 십자가는 373년 밀라노 주교로 선출되어 대대적인 교회 개혁과 사회 봉사활동에 앞장서 존경과 지지를 받은 암브로시우스의 상징이었다.

성 암브로시우스의 십자가는 제3차 십자군 원정 시기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의 상징으로 유명한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St. George's Cross)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성 게오르기우스의 십자가는 이후 잉글랜드의 국기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 비시오네

오른쪽의 용처럼 보이는 동물은 13~15세기 밀라노를 통치한 비스콘티 가문(House of Visconti)의 상징인 ‘비시오네’(biscione‧원어 발음은 ‘비쇼네’에 가깝다)라는 푸른 뱀이다. 비시오네는 이탈리아어로 큰 뱀이라는 뜻이다.

13세기 무렵 이탈리아 반도는 크게 북쪽의 신성로마제국과 남쪽의 시칠리아 왕국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1130년 노르만족이 세운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하에 비교적 안정세로 접어든 남부와 달리, 북부는 여러 도시 국가들로 쪼개져 복잡한 역학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이 막아선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배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한 탓이다.

비잔티움 제국 등 동방과의 교역과 십자군 전쟁을 통해 부를 쌓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의 상인과 지주들은 코무네(comune)라는 자치 공동체를 만들었다. 코무네는 세도가들이 도시와 그 주변 지역을 공동으로 지배하는 도시 공화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도시 국가들은 무역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였고, 도시 국가 안에서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 가문이나 세력 간에 끊임없이 대립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4세는 밀라노를 지배하던 델라 토레 가문을 견제하기 위해 1262년 오토네 비스콘티를 밀라노 대주교로 임명했다. 1277년, 오토네 비스콘티와 파가노 델라 토레가 밀라노 패권을 놓고 맞붙은 데시오 전투에서 오토네 비스콘티가 승리를 거두면서 새로운 지배자가 됐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7세로부터 밀라노 영주 칭호를 획득했고, 이후 비스콘티 가문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지방 전역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의 지배세력이 되면서 가문의 상징인 비시오네는 자연스레 밀라노의 상징이 됐다. 뱀이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紋章)으로 쓰이게 된 기원에는 수많은 설이 있다. 비스콘티 가문의 시조가 뱀에 물린 소년을 구한 데서 비롯됐다는 이야기부터 아이를 잡아먹는 밀라노 근교 호수의 용에 대한 전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파지오 박사는 비시오네의 기원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는 “십자군 전쟁 당시 사라센(Saracen‧십자군에 대항한 이슬람교도) 기사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오토네 비스콘티는 전통에 따라 그의 방패에 그려진 문장을 획득했다”며, “사람을 입에 문 뱀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전설은 비시오네의 기원과 더불어 뱀의 입안에 있는 사람이 사라센일 수 없는 이유도 설명해준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비시오네가 이슬람교도를 잡아먹는 십자군 원정대를 상징한다는 설에 대해 부정한 것.

파지오 박사는 비시오네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뱀은 머리부터 먹는 동물이다. 따라서 (상반신이 나와 있는) 비시오네의 사람은 뱀에게 잡아먹히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뱀의 몸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모습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뱀은 주기적으로 허물을 벗어 스스로 완전히 재생하는 특성 탓에 부활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진다. 뱀에서 나오는 인간은 ‘새 사람’(new man)을 의미한다. 정화되어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물(靈物)의 뱃속에서 다시 태어난 인간은 신화나 전설 속에서 흔한 주제다. 그리스도교 경전에는 요나라는 예언자가 등장한다. 구약성경 요나서의 주인공이다. 그는 여호와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가 거대한 물고기에게 삼켜져 뱃속에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다. 사흘 뒤 물고기는 요나를 토해냈고, 지상으로 다시 나온, 즉 다시 태어난 요나는 이후 여호와의 뜻을 따랐다. 이슬람교 경전에 등장하는 유누스는 요나와 동일인물이다. 코란의 내용도 구약성경의 것과 같으며, 이슬람교에서는 유누스를 알라의 예언자로 인정한다.
 

▲ 영물에서 나오는 인간의 모습은 여러 문명권에서 발견된다

예로부터 뱀은 교활함과 사악함 등 부정적인 이미지와 함께 지혜와 생명 등 긍정적인 이미지도 품은 양면성을 지닌 동물로 취급됐다. 그 예는 인류 최초의 영웅 서사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 수메르 남부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의 모험을 노래한 〈길가메시 서사시〉는 기원전 18세기 무렵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서사시다.

영생을 추구한 길가메시는 죽지 않는 능력을 얻는 데 실패하고, 대신 늙지 않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러나 그는 바다 밑바닥에서 어렵게 구한 불로초를 결정적인 순간에 뱀에게 빼앗겨 버리고 만다. 결국 길가메시는 죽음을 맞이하고, 불로초를 훔친 뱀은 늙지 않는 능력을 얻는다. 고대인들에게 뱀의 탈피 과정은 부활하는 모습처럼 보였으리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뱀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신총의 현무도, 삼실총의 장사도와 교사도 등이 대표적이다. 뱀은 대륙과 문명권을 초월해 불사‧재생‧영생을 상징하는 동물로 취급되어왔다.

1447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170년간 이어진 비스콘티 가문은 단절됐다. 이후 그의 사생아이자 독녀인 비앙카 마리아 비스콘티의 남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 지배권을 노린 피렌체‧베네치아‧나폴리와의 쟁탈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스포르차 가문의 시대를 열었다. 스포르차 가문은 이탈리아 북부 문화의 선구자를 자처해 학자와 예술가를 후원하며 문예를 장려했으며,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함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 밀라노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비시오네


   
▲ 인터밀란의 비시오네와 2010/2011년 원정 경기복

비록 비스콘티 가문의 역사는 막을 내렸지만, 비시오네는 스포르차 가문 문장의 일부가 됐고, 아직까지 밀라노의 상징이다. 밀라노 중앙역, 밀라노 대성당(두오모 성당) 등 시내 곳곳에서 비시오네를 발견할 수 있으며, AC 밀란과 함께 밀라노의 양대 축구팀인 인터밀란의 상징이기도 하다. “알파로메오는 전 세계 모든 자동차회사들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서 깊은 엠블럼을 갖고 있다”는 파지오 박사의 주장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신은 죽었다”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아침놀』(1881년)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허물을 벗지 못하는 뱀은 죽고 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낡은 견해를 바꾸지 못하는 정신은 정신이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비시오네에 담긴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21세기 관점에서 비시오네는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혁신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피아트 그룹은 알파로메오 재건을 위해 현재 50억 유로(약 6조8천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투자계획을 진행 중이다. 알파로메오의 화려한 부활을 기대해본다.

글 ‧ 임재현 [오토카 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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