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표절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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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표절의 경계
  • 임재현
  • 승인 2014.09.2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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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차가 나올 때마다 반복되는 것이 디자인 표절 시비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지난 2001년 미국 크라이슬러는 GM을 상대로 판매금지가처분신청을 낸 바 있다. 허머 H2가 7개의 수직 구멍으로 구성된 지프의 전통적인 그릴 디자인을 베꼈다는 이유에서다. 이 소송은 그동안 자동차 업계에서 암묵적으로 횡행하던 디자인 모방이 어느 선까지 허용될지에 대한 판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두 회사의 뿌리가 같다는 이유로 허머에도 권리가 있다며 허머의 손을 들어줬다. 디자인 자체가 아닌 외적인 요인을 근거로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디자인 분쟁에서 소송을 제기한 쪽이 승소하는 경우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극히 찾아보기 힘들다. 양 디자인이 완전히 동일한 경우는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동일한 디자인이란 디자인을 구성하는 물품의 형태(형상·모양·색채)가 시각적으로 동일한 미감(美感,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디자인권(權) 보호범위에는 등록디자인뿐만 아니라 그것과 유사한 디자인도 포함되기 때문에 결국 디자인권 침해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디자인 유사성 입증이 관건이다. 디자인 유사성의 판단기준은 각 구성요소가 아닌 전체이며, 부분적으로 유사하더라도 전체적으로 유사하지 않으면 비(非)유사 디자인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디자인 유사성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디자인 모방은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닌 파스티셰(pastiche, 여러 스타일을 혼합한 작품) 유형을 띠기 때문이다.

개그맨 윤형빈은 지난 8월 3일 방송된 tvN 〈코미디 빅리그〉의 ‘비겁한 형제들’ 코너에서 “요즘은 두 소절만 비슷해도 표절 판정이 난다”면서 “그래서 우린 한 소절만 비슷하게 만들었다”라는 표절 풍자개그로 관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다른 창작 분야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디자인계에서도 벤치마킹, 레퍼런스 등의 용어로 포장돼 다른 회사 제품들의 장점을 짜깁기한 혼성 모방이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세간의 의혹과 달리 유사한 디자인이 표절이나 모방의 결과가 아닌 우연의 산물인 경우도 있다. 자동차는 전체 개발기간이 최소 5년으로 길고, 개발 막바지에 디자인을 변경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출시 직전 표절한 새 디자인을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디자인 유사성의 근본적인 이유로 다음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자동차 디자인에도 시대적인 흐름과 유행이 있으며, 디자이너들은 그것을 따르기 마련이다. 1970~80년대 자동차 디자인 기조인 ‘에지 박스’(edge box)와 ‘웨지 라인’(wedge line)이 좋은 예다. 현재는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에 날카로운 각과 조각 같은 면을 강조한 ‘카브드 보디’(carved body)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둘째, 세계화와 인터넷 발달의 영향으로 전 세계 산업디자인학과 학생들은 대동소이한 내용의 교육을 받고 있으며,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셋째, 디자이너들은 비슷한 조형을 선호하는 성향이 있다. 제품 디자이너들이 과거 디터 람스(Dieter Rams) 시절의 브라운 제품에 쉽게 매료되는 것처럼 자동차 외장 디자이너들은 치타, 상어, F-117 나이트호크 스텔스 전폭기 등에 매혹되곤 한다.

디자인 등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신규성과 객관적 창작성이다. 국내 디자인보호법이 요구하는 객관적 창작성이란 과거나 현재의 모든 것과 비슷하지 않은 고도의 창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또는 현재의 것을 기초로 다른 미감적 가치를 창출했다면 객관적 창작성으로 인정된다. 창작성에 대해 상당히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Karim Rashid)는 한국 기업은 제품을 디자인할 때 (혁신적·실험적 디자인을 기피하는) 보수적인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모방주의에 편승할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디자이너에게 요구되는 능력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잘하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은 남의 것을 베끼는 것이 디자이너로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임을 명심해야 한다.

글·임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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