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형 SUV도 지프가 만들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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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형 SUV도 지프가 만들면 다르다
  • 임재현
  • 승인 2014.09.1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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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짚차’라는 말이 있다. 지프 차라는 뜻인데, 험로주행이 가능한 네바퀴굴림 차를 통칭하는 단어로 흔히 쓰인다. 과거 코란도, 레토나 등이 모두 ‘짚차’로 불렸다. 고유명사가 일반명사화 된 예다. 물론 지프는 엄연히 법인명이므로 허락 없이 상호 등에 쓰는 것은 상표권 침해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의 ‘짚차’처럼 미국에는 ‘jeep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지프를 타고 험로주행을 즐긴다는 뜻이지만, 험로주행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jeeping을 즐기는 사람을 ‘jeeper’라고 부른다. 그만큼 지프는 험로주행용 자동차의 대명사다.

지프라는 회사명의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중 미 육군에서 쓰는 용어 GP(General Purpose · 다목적)의 발음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기동 다목적 차량을 뜻하는 약자 HMMWV가 ‘험비’로 불리게 된 것과 비슷한 경우다. 경계초소를 뜻하는 G.P(Guard Post)의 발음에서 유래됐다는 주장도 있다.
 

체로키(Cherokee)는 북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원주민 부족명이다. 체로키 족은 16세기 유럽인들이 북미 대륙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무렵 주로 미국 남동부 미시시피 강 유역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1794년 미국과의 휴전조약 체결 후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문명화의 길을 걸었고, 1820년에는 영어 알파벳을 본뜬 독자적인 언어인 체로키어를 만들기도 했다.

체로키 족은 치카소 족, 촉토 족, 크리크 족, 세미놀 족과 함께 5대 부족 연합을 결성했는데, 북미 대륙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유럽인들은 이들을 ‘문명화된 다섯 부족’(Five Civilized Tribes)이라고 불렀다.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 기타리스트 지미 헨드릭스,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배우 조니 뎁 등이 체로키 족의 피가 섞인 유명인들이다.
 

1세대(SJ) 체로키는 1974년에 탄생했다. 1963년에 출시된 왜고니어(Wagoneer)가 기반이었다. 왜고니어는 픽업 트럭 섀시였지만, 당대 그 어떤 4×4보다 승용차에 가까운 형태였고 실내는 고급스러웠다. 왜고니어가 고급 SUV의 선구자라고 평가되는 이유다(랜드로버 레인지로버는 왜고니어 출시 7년 뒤에 나왔다). SJ 체로키는 왜고니어의 2도어 스포츠형 모델이었다(1977년에 4도어형이 추가됐다). 지프는 1974년 체로키 광고에서 ‘스포츠 유틸리티’(Sport Utility)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 SUV라는 명칭은 이렇게 탄생했다.

2세대(XJ) 체로키는 1984년에 데뷔했다. XJ 체로키는 당시 4×4 차의 상식이었던 프레임 방식 대신 모노코크 구조를 택했다. 트럭보다 승용차 감각에 가까워진 체로키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다른 자동차 회사들이 SUV에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됐다. 2001년에 공개된 3세대(KJ) 체로키는 북미시장에서 리버티(Liberty)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판매됐다(해외시장에서는 체로키를 계속 썼다). 이는 2007년 데뷔한 4세대(KK) 모델까지 이어졌다.
 

지프는 2013년 뉴욕모터쇼에서 리버티 후속모델을 선보이며 체로키라는 이름을 다시 가져왔다. 5세대(KL) 체로키다. 2001년 북미시장에서 리버티로 대체된 이래 12년 만의 재등장이었다. 최신형 KL 체로키는 크라이슬러와 피아트가 공동개발한 CUSW(Compact U.S. Wide) 플랫폼을 사용한 지프의 첫 모델이다. CUSW는 피아트가 약 1천300억원을 들여 개발한 모듈식 플랫폼 C-Evo의 롱 휠베이스 버전이다. D-Evo라고도 불리는 CUSW 기반으로 개발된 크라이슬러 그룹의 첫 모델은 2012년 데뷔한 다지 다트였고, 체로키가 두 번째다.

국내에는 2.4L 휘발유 엔진 혹은 2.0L 디젤 엔진을 단 총 3종의 모델로 출시됐다. 시승차는 최고등급인 리미티드 2.0 4WD. 7년 만에 체로키 명찰을 달고 나온 최신형 체로키의 첫인상은 유려하고 늘씬하다. 현대적 SUV의 개념을 정립한 XJ 체로키를 떠올리는 비례다. 전체적으로 현대적이고 세련미가 돋보이며, 어딘가 한국이나 일본 등 아시아 메이커의 도심형 크로스오버의 분위기가 감돈다. 북미시장뿐만 아니라 세계시장을 품고자 하는 포부가 엿보인다.

전면부 인상은 독특하다. 헤드램프가 있어야 할 곳에는 날렵한 형상의 LED 주간주행등과 방향지시등이 자리 잡았고, 헤드램프는 따로 떨어져 아래쪽에 배치됐다. 개성 있는 얼굴을 만든 심미적인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신호대기 시 앞에 선 승용차 운전자의 눈부심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물이 흐르는 듯한 보닛 끝에는 지프의 전통적인 7슬롯(slot) 그릴이 자리 잡고 있다. 옆면은 과감하게 굴곡져 입체감이 돋보인다. 넓게 비어 있는 타이어와 휠 하우스 사이의 간격은 강력한 험로주행 성능을 암시한다. 후면부에서는 도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실내는 유틸리티의 느낌이 강했던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고급화됐다. 아프리카 모로코, 이탈리아 베수비어스 산, 미국 그랜드캐니언을 모티브로 디자인했다고 한다. 스티어링 휠 하단에 각인된 ‘SINCE 1941’에서 지프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1941년은 랭글러의 시조 격인 윌리스 MB(Willys MB)가 나온 해다. 미 육군용 다목적 차였던 윌리스 MB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전장을 누볐다.
 

체로키의 앞 유리 중앙 하단에는 험로를 오르는 윌리스 MB의 모습이 자그맣게 그래픽으로 표현돼 있다. 지프 개발진이 체로키를 개발하면서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장재 수준은 전반적으로 높은 편이지만, 몇몇 부분은 아쉽다. 특히, 금속을 흉내 낸 은색 플라스틱 부품들은 전혀 금속처럼 보이지 않고 조악하다.

계기판 중앙에는 해상도가 매우 높은 7인치 TFT LED 화면이 자리 잡았다. 다양한 주행정보를 깔끔하게 표시해준다. 센터페시아의 버튼은 최소한으로 억제됐고, 세부 기능은 8.4인치의 큼지막한 터치스크린을 통해 조작한다. 첨단의 느낌은 주지만, 앞좌석 통풍·열선 기능조차 스크린을 통해 조작해야 하는 것은 조금 번거롭다. 앞 시트는 몸을 편안히 감싸는 형상이고, 쿠션은 푹신푹신하다. 뒤 시트는 앞좌석보다는 평면적이지만 불편하지는 않다.
 

   
 
   
 

뒷자리는 비좁지는 아니지만, 다리 공간과 머리 공간에 큰 여유는 없다. 뒤 시트는 60/40으로 분할돼 각각 독립적으로 최대 150mm 앞뒤로 슬라이딩되는 것이 특징이다. 다만, 뒤로 끝까지 밀어도 다리 공간이 여유롭지는 않아서 내부 공간을 더 확보한다는 의미는 덜하다. 대신 앞으로 밀어 트렁크 공간을 더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트렁크 공간이 약간 부족해 시트를 접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요긴하게 쓰이게 될 기능이다. 실내 곳곳에는 넓고 다양한 수납공간들이 준비돼 있다. 글러브박스는 소형 노트북이 여유롭게 들어갈 만큼 넓고, 센터콘솔의 수납함에는 스마트폰용 무선 충전기도 갖추고 있다.
 

체로키에 들어간 직렬 4기통 2.0L 터보 디젤 엔진은 피아트 그룹에서 광범위하게 쓰고 있는 멀티제트(MultiJet)2 엔진이다. 지프에서는 에코디젤(EcoDiesel)이라는 명칭을 쓴다. 지프 모델로는 체로키에 처음 들어갔다. 시동을 켜면 엔진의 소음과 진동이 상당하다. 소음·진동 억제 대책이 아쉽다. 170마력을 발휘하는 엔진은 인상적인 가속감을 선사하지는 않지만, 꾸준하게 등을 떠민다.

가속을 끝내고 항속에 들어가면 조용하고 부드럽다. 노면 소음과 풍절음이 잘 억제돼 고속에서도 쾌적하다. 변속기는 ZF제 9단 자동. 9단 자동변속기가 들어간 첫 지프 모델임과 동시에 동급 최초이기도 하다. 변속은 매우 부드럽게 이어진다. 다만, 연비 중시로 세팅됐는지 고단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해 언덕길에서도 시프트 다운이 더디다. 서스펜션은 노면 상태와 상관없이 유연하게 움직여 모든 좌석에서 편안하다.

체로키 리미티드 2.0 4WD에는 어댑티드 크루즈 컨트롤(ACC), 차선 이탈 방지, 전후방 추돌 경고, 후측방 사각지대 경고 등 현존하는 거의 모든 능동형 안전장비가 만재돼 있다. 무슨 기능이 얼마나 들어갔나 보다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체로키의 각종 안전장치들은 모두 훌륭하게 작동하며 제 역할을 해낸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ACC. 옆 차선에서 앞으로 끼어드는 차를 감지하고 감속하는 과정에 위화감이 전혀 없고, 가·감속이 자연스럽다. 주·야간 고속도로, 산길, 도심도로 등 모든 환경에서 훌륭하게 작동해 한 번 속도를 설정해두고 스티어링 조작만 하면 된다.

ACC를 단 차들 중에는 레이더가 구불구불한 길은 물론 완만하게 도는 코너에서도 앞차를 놓치는 경우가 잦은 차도 있다. 하지만 체로키의 ACC는 앞차를 놓치는 법이 거의 없다. 반(半) 자율주행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실용적이고 기술의 완성도가 높다. 스티어링 휠에 있는 버튼을 통해 설정하기도 쉬워 편리하게 쓸 수 있다. 전후방 제동 어시스트는 민감해서 높게 자란 풀을 장애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잦았다. 거슬린다면 차량설정을 통해 꺼둘 수 있다.
 

도심형 SUV라고 해도 지프가 만든 차라면 험로주행에서 진가가 발휘될 것이다. 시승 기간 내내 비가 많이 내려 험준한 코스는 피했다. 대신 흙, 진흙, 풀, 자갈 등 다양한 표면으로 구성된 원만한 코스를 골랐다. 체로키 전 모델에는 지프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지형 설정 시스템 ‘셀렉-터레인’(Selec-Terrain)이 기본사양이다. 시승차인 체로키 리미티드 2.0 4WD에는 하위 모델에 들어간 액티브 드라이브 I에 저속 기어와 토크 제어 기능이 추가된 액티브 드라이브 II가 들어간다.
 

셀렉-터레인은 오토(AUTO), 스노우(SNOW), 스포츠(SPORT), 샌드/머드(SAND/MUD) 등 4가지 모드를 제공한다. 모드에 따라 최대 12항목의 시스템 설정이 바뀌어 주행상황에 따른 최적의 성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체로키는 비가 내리는 진흙 경사로를 싱거울 정도로 거뜬히 올라갔다. 진입·탈출 각이 커 일반적인 도심형 SUV로는 감히 생각도 못할 경사로에도 문제가 없다. 눈앞에 어떤 지형이 펼쳐지든 자신감이 붙는다. 거슬렸던 엔진 소음과 진동도 험로에서는 다 잊게 된다. 오히려 강인한 트럭에 타고 있는 듯한 든든한 신뢰감을 주는 요소로 작용한다.
 

비포장도로에 초점을 맞춘 설계 특성은 포장도로에서 대부분 단점으로 바뀌어버린다. 잠깐의 모험을 위해 일상생활에서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 하지만 체로키는 도시인과 모험가의 기질을 모두 갖췄다. 대다수의 SUV들이 대형 마트나 어린이집 앞을 오갈 때 체로키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마치 아파트 단지 언덕처럼 오르내릴 수 있다. 체로키 운전자들은 도로 위의 수많은 SUV들을 보며 “당신 차로는 못하지만 내 차로는 할 수 있지”라는 우월감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체로키는 다양한 경험을 가능케 해 인생을 다채롭고 풍요롭게 채워줄 도구다. 이 얼마나 ‘스포츠 유틸리티’라는 본질에 충실한 자동차인가! 문명화된 다섯 부족 중 하나였던 체로키 부족처럼, 체로키는 ‘문명화된 4×4’다.

글 · 임재현
사진 · 김위수(스튜디오 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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