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G의 고속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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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G의 고속 신화
  • 앤드류 프랭클
  • 승인 2014.04.0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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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좋은 소식은 이상한 모양으로 전해진다. 한스-베르너 아우프레히트에게 메르세데스-벤츠의 결정은 날벼락이었다. 그때 메르세데스는 1965년의 일체의 모터스포츠에서 철수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10대였던 아우프레히트는 메르세데스의 경주용 엔진을 만들 꿈을 꾸고 있었다. 바로 그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은 직후에 꿈이 산산이 깨어질 위기를 맞았다.

인물이 그보다 나약했다면 불가피한 사정을 받아들이고 로드 카 엔진 만들기로 돌아갔을 법하다. 한데 아우트레히트는 달랐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 에르하르트 멜허와 함께 300SE 한 대를 사들여 해체했다. 그런 다음 출력을 172마력에서 241마력으로 끌어올렸다. 게다가 만프레트 쉬크가 운전대를 잡고 1965 독일 투어링카 선수권(DTM)에서 10승을 거뒀다.

이 소식이 널리 퍼졌고, 이듬해 말이 되자 도로나 트랙에서 더 빨리 달릴 메르세데스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다. 때문에 1967년 아우프레히트와 멜허는 메르세데스를 떠나 그로스아스파흐 부근에 독자적인 작업장을 마련했다. 아우프레히트(Aufrecht), 멜허(Melcher)와 그로스아스파흐(Großaspach)의 머리글자를 하나로 모으자 AMG가 태어났다.

작업물량이 밀려들어왔다. 심지어 메르세데스도 정신이 번쩍 들어 고성능 튜닝카를 내놓기 시작했다. 가장 두드러진 실례가 1968년 나타난 6.3L 300SEL. 한데 AMG로서는 자기 사업을 망칠 처사로 봤을 듯하지만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받아들였다. 메르세데스의 슈퍼 세단이 아무리 빨라도 AMG는 그 차를 더 빠르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자그마치 3년이 걸렸지만, 1971년 스파 24시간 레이스가 벌어질 때 250마력 6.3L 300SEL 로드카를 434마력 6.8L 경주차로 탈바꿈했다. 우람한 빨간 경주차가 트랙에 나오자 관중과 드라이버가 모두 숨을 멈췄다. 하지만 SEL은 굉음을 울리며 종합 2위에 클래스 우승. 종합우승의 발목을 잡은 것은 오직 어지러운 피트스톱뿐이었다. 연료소비량이 많아 자주 피트에 들어가야 했다.

그들의 사업은 번창했다. 엔진만 아니라 주문형 실내 작업이 계속 들어왔다. 1976년이 되자 사업규모가 커져 그로스아스파흐를 떠나 아팔터바흐로 옮겨야 했다. 회사명은 그대로이지만 오늘날까지 AMG는 아팔터바흐에 둥지를 틀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자 AMG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마침내 기존 제품의 튜닝에 그치지 않고, 독자 모델이라고 할 만한 제품이 나왔다. 1984년의 AMG 500SEC는 순수한 메르세데스 제품을 멀리 앞서 4밸브 기통을 받아들였다. 한데 1986년에 와서야 AMG는 세계자동차계에서 돌파구를 열었다. 지극히 당연하게 ‘망치’(The Hammer)로 알려진 차가 나왔다.

AMG가 메르세데스의 최대 엔진(5.6L)을 우겨넣은 중형 W124가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지만 새 차에는 독자적인 4밸브 헤드를 달았다. 한때 <오토카>의 시승 전문기자 데이비드 비비언은 이렇게 썼다. “페라리 288 GTO의 기를 죽일 만큼 빠르지만, 우리 할머니도 몰 수 있다” 4단 자동박스를 갖춘 뒷바퀴굴림 세단은 0→시속 100km 가속시간 5.0초 이하에 최고시속 295km.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었고, 실로 황당한 고성능 차였다.

그동안 메르세데스와 AMG는 다른 차 메이커와 튜닝회사 이상으로 원활한 관계를 이뤘다. 1990년 이들은 정식으로 협력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메르세데스는 AMG의 신뢰성을 활용할 수 있었다. 동시에 AMG는 메르세데스의 보증을 받아 메르세데스 딜러에서 팔게 됐다. 하지만 메르세데스와 AMG가 제품 디자인에 협력하게 된 것이 가장 뜻 깊었다.

이런 노력의 제일 첫 열매가 W202를 바탕으로 한 1993 C36 AMG. 오늘날 AMG C클래스 507마력을 살 수 있다. 따라서 276마력 C36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E36 BMW M3과 대등하다고 봤다. 다만 스프링이 한결 부드럽고 차체가 더 무겁고 4단 자동변속기를 그대로 지키고 있어 성격은 아주 달랐다. 실로 중요한 차였다. 뒤이어 나올 모든 AMG 모델의 기틀을 잡았으니까 말이다.

그 뒤 1990년대에는 핵심제품의 튜닝 라인업을 만들어내는 데 전념했다. 노즈에 메르세데스 엠블럼을 단 가장 광적인 모델 일부가 이때 나왔다. 예를 들어, 5.0L 엔진과 수동변속기가 조합된 G60 AMG 오프로더, 길이 6m에 6개 도어의 S63 AMG 풀만과 CLK GTR 르망 경주차의 오프로더 버전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SL73 AMG 로드스터는 7,291cc. 제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양산 메르세데스 로드 카에 얹힌 최대 엔진이다.

하지만 결코 최강은 아니었다. 2001년에 이르러 메르세데스와 AMG는 2차 대전 이전에 그랑프리를 휩쓸었던 기술을 받아들였다. V8 5.4L 엔진에 슈퍼차저를 달아 새 차원의 출력과 성능에 도달했지만 운전성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최저 출력 버전은 2002년 E55 AMG 세단마저 페라리 F40과 출력이 똑같았고, 전자 리미터로 시속 250km에 묶지 않았다면 시속 320km로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이듬해 2003년은 AMG의 풍년이었다.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엔진을 받아들인 맥라렌 SLR이 있었다. 다른 끝에서 AMG는 첫 디젤(누가 C30 CDI AMG를 기억할까?)을 만들었다. 출력은 겨우 230마력에 엔진은 5기통. 같은 해 AMG는 트윈터보 V12 6.0L를 S-클래스에 도입했다. 오늘까지 S65 AMG를 움직이는 엔진의 하나다.

그로부터 2년 뒤 또 다른 이정표가 닥쳤다. 신형 V8 6.2L 자연흡기엔진이 V8 구형 터보 엔진을 밀어냈다. 놀랍게도 완전히 순수한 AMG 엔진 제1호였다. 기존 메르세데스 제품과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울러 이때가 메르세데스와 AMG가 ‘블랙 시리즈’ 제1호 SLK AMG 블랙 시리즈를 출시한 해였다.

더 많은 블랙 시리즈 모델이 뒤따랐다. 거기에는 경이적인 CLK 블랙과 어딘가 미흡한 SL65 블랙이 들어 있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AMG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의 준비단계에 불과했다. 맥라렌이 SLR을 개발할 장비를 갖췄을 때 AMG 일부 인사들은 찔끔해서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뺏겼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들에게 기회가 닥쳤다. SLS로 처음 주문형 AMG를 만들었다. SLR보다 싸면서도 운전성능이 더 뛰어났고, 걸윙 도어를 다시 들여놨다. 게다가 SLS AMG E-셀은 최초의 완전 전기 슈퍼카였다.

이제 AMG의 첫 해치백 A45 AMG가 등장했다. 게다가 B-클래스를 제외하고 모든 메르세데스 승용차의 AMG 버전이 나왔다. 하나도 빠짐없이 “한 사람이 한 엔진”이라는 AMG의 철학을 따랐다. 앞으로 신형 C63 AMG와 물론 SLS의 후계차가 나온다. 그 후계차는 SLS와는 전혀 다른 포르쉐 911의 라이벌이다. 사상 최고의 스포츠카 아이콘의 뒤를 잇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다름 아닌 아팔터바흐의 AMG 정예들은 그 일을 해내고도 남는다.

글: 앤드류 프랭클(Andrew Frank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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