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 묻힌 선구자와 그들을 흉내 낸 명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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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속에 묻힌 선구자와 그들을 흉내 낸 명차들
  • 아이오토카
  • 승인 2019.06.18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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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세계의 진정한 선구자들은 종종 역사에서 잊히고 성공을 거둔 모방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앤드류 프랭클(Andrew Frankel)이 기울어진 평가를 바로 잡는다

윈스턴 처칠의 선견지명에서 돋보이는 이야기 중 하나. “역사는 내게 관대할 것이다. 내가 역사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그랬던 만큼, 부분적으로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처칠이 아주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악의 힘을 억제하지 못했더라면, 그가 기울인 노력과는 달리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역사는 승자들이 쓰는 것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학교에서 배운 역사 수업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패배했던 전투들에 관한 얘기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떠올려보라. 나는 많지 않으리라는 것에 내기를 걸겠다.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당연하게 떠올리기보다는 대개는 가장 크게 성공했던 것들을 쉽게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선구자들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고 그 경험을 역사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는데 활용한 차들이 있는가 하면, 진짜 독창적인 차들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이 자리를 통해 조금이나마 균형을 바로잡는 차원에서 그런 10개의 사례를 짚어보려 한다.

 

핫해치 (고성능 해치백)


 

진짜 선구자 ; 1971 아우토비앙키 A112 아바르트

 

흔히 알려진 선구자 ; 1975 폭스바겐 골프 GTI

 

아우토비앙키(Autobianchi)는 피아트를 바탕으로 만든 제품의 판매에 집중하면서도, 독자적인 모습과 조율을 반영한 피아트의 파생 브랜드였다. A112는 피아트 127의 동력계를 얹은 3도어 해치백으로 1969년에 첫선을 보였지만, 아바르트 버전은 1971년에 더 큰 엔진과 더불어 최고출력이 41마력에서 59마력으로 높아져 나왔다.

 


아직 충분히 고성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다른 차 이야기도 들어보시길. 골프가 왕좌를 차지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1974년에 심카(Simca)가 의미 있는 튜닝을 거쳐 1.3L 엔진의 출력을 60~80마력 이상으로 끌어올려 진짜 핫해치로 탈바꿈시킨 1100Ti를 출시한 것이다. 합금 휠, 검은색으로 칠한 그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재미있던 6개의 헤드라이트도 중요한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최고시속은 160km를 넘겼고 0→시속 97km 가속 시간이 12초 정도 걸렸다. 1974년 기준으로는 전혀 나쁘지 않다. 알파로메오가 알파수드에 해치백 모델을 더하는데 10년 넘게 걸리지 않았더라면, 처음 출시한 1971년에 첫 핫해치라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으리라는 점도 염두에 둘 만하다.

 

미드엔진 승용차

진짜 선구자 ; 1962 르네 보네/마트라 제트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66 람보르기니 미우라

 

람보르기니 미우라(Miura)는 1966년 제네바모터쇼를 참관한 관중들의 탄성 속에 공개되었다. 포뮬러 원(F1) 경주차처럼 운전자 바로 뒤에 엔진이 놓인 것도 여러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러나 관중들이 주의를 기울였다면, 람보르기니가 일반 도로용 차에 이 아이디어를 구현한 첫 브랜드가 아닌 것은 물론, 심지어 두 번째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첫 번째는 이름이 재미있는 르네 보네 제트(Rene Bonnet Djet)라는 차였다. 1962년에 나온 이 차는 1964년에 좀 더 따분한 이름인 마트라(Matra) 제트가 되었다. 당시 기준으로 이 차의 특징은 특별했다. 미드엔진, 네바퀴 디스크 브레이크와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을 갖추고 전체 무게는 700kg을 밑돌았다. 아쉽게도 값이 지나치게 높은 탓에 소비자에게 제대로 평가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두 번째 미드엔진 승용차인 1964년형 데 토마소 발렐룽가(Vallelunga)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차가 실패한 이유는 전반적으로 제대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1968년에 좀 더 활기차졌지만 여전히 한계에서는 거칠었던 망구스트(Mangusta)로 대체되었다.

 

럭셔리 SUV

진짜 선구자; 1966 지프 슈퍼  왜고니어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70 레인지로버

 

요즘처럼 SUV가 새로운 자동차의 표준이 되고 롤스로이스까지도 SUV를 만드는 시대에는, 럭셔리 SUV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인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 이후 레인지로버가 나오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호화로운 버전을 만드는 것에 있어서도 지프가 랜드로버보다 몇 년 빨랐다.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매끄럽게 작동하는 6기통 엔진에 앞 독립 서스펜션까지 갖춘 왜고니어(Wagoneer)를 살 수 있었다.

 

1966년에 나온 슈퍼 왜고니어는 특별했다. 의도적이고 확실하면서 당당하게 고급스러움을 표현했다. V8 5.4L 엔진, 자동변속기, 파워 스티어링, 에어컨, 가죽 시트를 갖추고 있었다. 레인지로버가 판매를 시작하기 4년 전, 지프는 그 차를 가리켜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 중 가장 비범한 럭셔리 왜건’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그것은 적절한 아이디어였지만 시기가 나빴다. 그래서 극소수만 팔렸을 뿐 지금은 거의 완전히 잊혔다.

 


모노코크 구조 차


 

진짜 선구자 ; 1922 란치아 람다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34 시트로엥 7CV 트락숑 아방

 

1962년 로터스 25용으로 구조 전체가 스트레스에 견디는 F1 ‘욕조형’ 구조를 처음 만든 콜린 채프먼(Colin Chapman)은 경주의 모습을 바꿔놓았다. 그보다 앞서 쓰이던 스페이스프레임보다 더 가볍고 튼튼했기 때문에, 다른 팀들은 이 설계를 받아들이거나 포기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체형 차체구조는 그전부터 이미 수년 동안 쓰이고 있었다.

 


시트로엥 7CV 트락숑 아방은 앞바퀴굴림, 앞 독립 서스펜션, 모노코크 섀시의 세 가지 특성을 선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그중 실제로 최초였던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섀시에만 한정해보면 진정한 선구자는 12년 먼저 선보인 란치아 람다였다. 차가 만들어진 과정은 람다가 진정한 선구자라는 단 한 가지였지만(앞 독립 서스펜션도 시트로엥보다 먼저였다), 차체 전체가 구조 부하에 견디는 구성 기술은 승용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발 기술 중 하나였다. 이는 차를 더 가볍고 강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더 안전하고 빠르며 효율적이고 몰기 좋은 것이 되었다.

 

터보엔진 승용차

진짜 선구자 ; 1962  올즈모빌 제트파이어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73 포르쉐 911 터보와 BMW 2002 터보

 

포르쉐 911 터보나 BMW 2002 터보가 터보엔진을 얹은 첫 승용차였을까? 두 차 모두 1973년 프랑크푸르트모터쇼에서 첫선을 보였다. 글쎄, BMW가 먼저 양산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솔직히 앞서 한 질문은 속임수였다. 실제로는 올즈모빌 제트파이어(Jet fire)가 최초다.
제트파이어가 새 차로 등장한 1962년에도 터보 과급은 자동차 분야의 신기술은 아니었다.

 

사실 무기 마니아들 수준의 퀴즈를 원한다면, 1952년 인디애나폴리스 500 경주에서 예선 1위를 차지한 차에 터보 디젤엔진이 올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것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 경주차에 디젤엔진이 쓰였다. 그러나 쉐보레 콜베어 몬자(Corvair Monza)와 함께 그 기술을 일반 도로 위로 가져온 첫 차는 제트파이어였다.

 


제트파이어는 가레트 에어리서치(Garrett AiRe search)가 만든 터보를 알루미늄 V8 3.5L 터보로켓(Turbo-Rocket) 엔진에 달아 최고출력을 218마력으로 높인 올즈모빌 커틀래스(Cutlass)였다. 아쉽게도 정상 작동하려면 가솔린 말고도 알코올과 증류수가 필요했다. 소비자들은 이런 복잡함을 싫어했고, 제트파이어는 1만 대도 채 만들어지지 않고 사라졌다.

 

앞바퀴굴림 차

진짜 선구자; 1928 알비스 프론트휠 드라이브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59 미니

 

이 부문의 ‘흔히 알려진 선구자’에 관해서 반박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미니가 같은 동력계 배치를 쓴 차 중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형차 자리를 빼앗기 25년 전, 시트로엥 트락숑 아방(Traction Avant)이 앞바퀴굴림 방식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두 차 모두 최초가 아니다. 최초는 알비스(Alvis)였다. 1920년대 알비스는 모든 형태와 크기의 고품질 스포츠카를 만드는 회사였다. 그러나 1928년 알비스는 전혀 예상지 못한 일을 해냈다. 여러 자동차업체가 20세기에 들어선 이후 시험하던 네바퀴굴림 개념을 승용차에서 구현한 것이다. 일반도로용 스포츠카와 경주용 차를 모두 염두에 두고 만들었으며, 슈퍼차저를 단 것과 달지 않은 것이 모두 있었던 앞바퀴굴림 알비스는 이제 거의 잊힌 골동품이다.

 

그러나 90년 전에 나온 이 차는 대단히 빨랐다. 혹시라도 1928년에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작은 알비스가 6위를 차지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르망에서 1.5L 엔진을 얹은 그 차를 이긴 차들은 보닛 아래에 배기량 4L가 넘는 엔진을 싣고 있었다. 약 150대가 만들어진 앞바퀴굴림 알비스는 지금은 드물고 진귀하다.

 


탄소섬유제 승용차

진짜 선구자 ; 1990 재규어 XJR-15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94 맥라렌  F1

 

맥라렌 F1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는 것은 아니다. 욕조형 구조와 차체를 완전히 탄소섬유로 만든 첫 승용차인 것은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소섬유는 그보다 먼저 나온 승용차(페라리 F40이 유명하다)에도 쓰였고, 차체 전체를 탄소섬유로 만든 첫 승용차 자리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재규어 XJR-15에게 돌아갔다. XJR-9 그룹 C 경주차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미 존재하는 경주차를 일반도로용으로 개조한 차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완전히 일반도로용으로만 등록된 차가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차에 타기에는 몸집이 큰 탓에 직접 몰아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기사에는 이 차가 몰기에 무척 위험하다고 쓰여 있다. 특히 고속 주행을 시도할 때 그렇다. 그러나 선구자의 길은 원래 그런 것이다. 처음에 도전하느냐, 아니면 제대로 도전하느냐의 선택일 뿐이다. 두 가지 이상이 하나의 결실을 맺는 경우는 드물다.

 

브레이크 잠김 방지장치(ABS)


 

진짜 선구자; 1966 젠센 FF<br>
진짜 선구자; 1966 젠센 FF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78 메르세데스-벤츠 W116 S-클래스

 

브레이크 잠김 방지장치는 1966년에 젠센(Jensen) FF가 등장했을 때도 전혀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던롭 맥서레트(Maxaret) 시스템은 이미 항공업계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었다. 비행기는 무겁고 빠른 속도로 지면과 부딪치기 때문에 착륙할 때 미끄러지는 경향이 컸다. 브레이크 잠김 방지 시스템을 쓰면서 비행기는 악천후에서 더 안전해졌고, 짧은 활주로를 쓰거나 더 무거운 짐을 싣는 것도 가능해졌다. 아울러 타이어 교체에 드는 비용도 아낄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스템을 승용차에 처음 쓴 것이 FF였다. 시스템은 완전 기계식이었고 유압이 줄어들기 전에 바퀴 회전이 멈춰야 했지만, 초당 최대 열 번까지 브레이크를 작동시켰다가 해제하기를 반복할 수 있었다.
W116 S-클래스를 통해 등장한 메르세데스-벤츠 시스템은 정교한 다중채널 시스템을 통해 전자식으로 작동했으며, 오늘날 차에 달린 ABS와 원리가 비슷했다. 그러나 최초의 시스템은 아니었다.

 

고성능 네바퀴굴림 차

진짜 선구자; 1966 젠센 FF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80 아우디 콰트로

 

우리는 아우디 콰트로가 네바퀴굴림 장치의 유용함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바꿨는지 기억한다. 이제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험한 지역에 다다르기 위해 필요한 장치에 그치지 않고, 즐기기 위해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젠센이 정확히 14년 먼저 그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젠센 FF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1966년에는 혁명 그 자체였다.

 

FF는 퍼거슨 포뮬러(Ferguson Fomula)를 뜻하는 말로, 크라이슬러 V8 6.3L 엔진의 출력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활용하게 해준 퍼거슨 네바퀴굴림 장치를 달았다는 사실을 반영한 표현이다. 퍼거슨은 P99 경주차에 처음 그 기술을 썼다. P99는 지금까지 F1에서 우승한 유일의 네바퀴굴림 경주차이기도 하다. 1961년 울튼 파크(Oulton Park) 골드컵 경주에서 스털링 모스(Stirling Moss)가 몰고 우승했다.  

 


아쉽게도 이 기술은 비용이 저렴하지 않았고, 차를 우측통행용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소수만 제작되었다. 그래서 아우디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고삐를 넘겨받아 새로운 ‘콰트로’ 서브 브랜드를 만드는데 박차를 가했다.

 

SUV

진짜 선구자; 1941 윌리스 MB

 

흔히 알려진 선구자; 1948  랜드로버

 

윌리스 MB는 지프라는 별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 이름의 유래에 관해 오가는 이론적 논쟁을 검증하려면 이 잡지의 나머지 지면을 모두 할애해도 모자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차 자체에 관해서는 더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무척 다루기 쉽고, 가볍고, 모든 목적에 쓸 수 있는 차를 만들라는 미군의 명령이 낳은 결과다. 선발대회 우승자는 윌리스였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세 가지 장비로 상륙함과 다코타 수송기, 그리고 이 차를 꼽았을 정도로 지프는 놀랄 만큼 견고하고 목적에 잘 맞는 차였다. 로버는 평화를 누리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도 어디든 가야 하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차를 만들었다. 랜드로버는 더 나은 차를 설계할 수 있을 때까지 공백을 메울 차로 서둘러 생산되었고, 거의 70년 동안 꾸준히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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