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큐라 NSX로 루트 66을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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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큐라 NSX로 루트 66을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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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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맷 프라이어(Matt Prior)가 어큐라 NSX를 몰고 여행에 나섰다. 너덜너덜한 잭 케루악의 소설을 친구삼아 떠난 오리지널 도로 여행, 과연 최고였을까?

 

 

미국 ‘루트 66’(Route 66)이 어떤 곳인지 느끼고 싶지만 4000km에 달하는 장거리를 일일이 둘러볼 순 없다. 그렇다면 매클레인을 찾아가라. 텍사스 주의 소도시 매클레인은 20세기 초, 주변에 가축수송용 철도역이 생겨나면서 터를 잡기 시작했고 그 시설은 삽시간에 커졌다. 석유와 소, 다른 가축들이 이 역을 통해 오갔다. 게다가 1926년, 미국이 고속도로를 구축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유명한 노선 중 하나가 바로 ‘루트 66’이었다. 이 도로는 시내 중심가를 통과했고, 1940년대에는 1500명의 사람들이 이 북적이는 작은 마을에 살았다. 


도시가 발전하자 미국 심장부의 수많은 중소도시에 일어나는 현상이 매클레인에도 몰아쳤다. 규모가 더 커진 중심지역에 산업 활동이 집중되면서 2.5km 길이의 열차와 시속 120km의 트럭들이 매클레인을 우회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인터스테이트(Interstate) 40은 매클레인을 돌아갔고, 그때부터 이 도시는 시들었다. 영국에서는 우회도로가 군소도시를 되살렸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정반대로 인구를 몽땅 빨아내고 빈터만 남겼다. 

 

오늘날 매클레인은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2차선 일방통행 도로를 자랑한다. 2.6km² 남짓의 격자형 시가지에 800명이 채 되지 않은 인구가 살고 있다. 초라한 모텔 하나와 지금은 살지도 않는 방울뱀을 주의하라는 경고판이 서 있다. 괴기하게도 철조망을 친 박물관마저 있었다. 콘크리트 고속도로를 달리는 타이어 소리를 배경으로 빈 건물이 줄을 지었다. 매클레인은 북부 공업도시의 텅 빈 선박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이곳은 기온이 더 높을 뿐이었다. 황량하면서도 묘하게 호기심을 자극했다.


물론 루트 66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있었다. 다시 손질한 낡은 주유소 하나와 골동품 가게들이 있었다. 모두가 역사 깊은 루트 66의 단골이었다. 루트 66 표지판은 종종 ‘역사적 루트 66’(HIstoric Route 66)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좋은 시절을 되살리며 소도시의 향수를 팔아보려는 상술인 것이다. 그러나 조금 경험해보니 미국의 아침식사만큼이나 푸근했다. 미국 도로여행의 원조를 직접 경험하기 위해 마멋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그라운드호그 데이 다음인 2월 3일로 출발일을 잡았다. 매클레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시카고를 떠난 뒤 1600km를 달린 후였다. 그래도 루트 66을 완주하려면 로스앤젤레스의 산타모니카 부두까지 2400km가 남아있었다. 

낮고 넓은 어큐라 NSX는 시카고의 아스팔트를 감싸 안았다. 거기서 루트 66의 모험이 시작됐다

 

나는 꼭 완주하고 싶었다. 왜? 배경에 깔린 이야기에 끌린 나는 언제나 미국대륙 횡단을 꿈꿨다. 그리고 혼다 관계자들에게 NSX, 바로 이 자리에 나온 어큐라 NSX을 빌려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선뜻 응했다. 그래서 미국 도로여행에 미국에서 만든 차를 몰고 나서게 됐다. 나는 영국에서도 NSX를 좋아했다. 차폭이나 거대한 덩치 탓에 때로는 우리의 여건에게는 맞지 않았다. 분명히 의도적으로 맥라렌 570 GT나 포르쉐 911과 차별화했다. 우리는 공장을 한 바퀴 둘러보고 오하이오 주를 가로질렀다. 그런 다음 오후 반나절을 지나서야 얼어붙은 일리노이 주 시카고를 떠났다.


‘오리지널’ 루트 66의 85% 정도는 그대로 달릴 만했다. 가이드북에는 제대로 여행을 하려면 줄잡아 한 달, 또는 그 이상을 들여야 한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우리는 8일 만에 여행을 끝내야 했다. 우리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기로 했다. 루트 66이 명성을 얻은 방향이고 인구이동의 통로였기 때문이다. 그중에도 대평원지대의 무서운 가뭄이 덮쳤던 1930대가 제일 심했다(당시 시카고와 뉴욕에도 가뭄으로 인한 먼지가 쏟아졌다). 그때 수만 명 농민들이 서쪽 캘리포니아로 몰려갔다. 

 

시카고를 빠져나오자 루트 66의 시가지 도로는 교외노선으로 바뀌었다. 그때부터 고속도로였다. 우리는 2시간을 달려 땅거미가 질 무렵 드와이트에 도달했다. 우리가 하는 식으로 여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치밀한 계획 없이 늦은 시간에 도착해 몹시 지쳤다. 간신히 초라한 모텔과 문이 열린 오직 하나밖에 없는 패스트푸드 가게를 찾았다. 주인은 내가 지금까지 본 가장 위생관념이 없는 사람 같았다. 절대 허풍이 아니었다. 출발이 좋지 않았다. 룩 미안해. 내 실수야.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니 사정이 조금 나아졌다. 드와이트는 통과하는 도시 중 하나였다. 괴기하고 조용했다. 우리는 오래된 주유소의 자원봉사자 폴을 찾았다. 아직 시즌이 되지 않아 문을 열지 않은 박물관도 있었다. 폴은 차를 몰고 지나가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현장을 봤다. 영국에서라면 “여기서 도대체 뭘 하는거요?”라며 소동을 벌일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루트 66과 NSX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자고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우리 대화에는 우정이 넘쳤다. 500km에 가까운 주행거리, 나긋한 승차감, 여기서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는 차폭, 미국의 황당한 드라이브웨이 램프와 씨름하는 노즈가 화제에 올랐다. 

 

드와이트부터 루트 66은 고속도로와 나란히 달렸다. 그러다가 고속도로가 도시를 돌아갈 때마다 둘은 갈라졌다. 우리는 고속도로와 시가지, 고속도로, 시가지를 되풀이했다. 드와이트 다음은 오델이었다. 거기에는 샌프란시스코나 쇼어디치에도 어울릴 만한 멋진 카페가 있었다. 다만 엄청 큰 오물렛과 함께 감자칩과 그레이비가 따라 나왔다. 아침식사 시간이라 생뚱맞았다. 
두어 군데를 둘러본 뒤 크게 깨달았다. 루트 66의 커피숍을 모두 들렀다가는 이번 여행이 일 년이라도 모자랄 지경이라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카페를 그대로 지나쳐 나간 뒤 일리노이주 애틀랜타로 들어갔다.

 

그런데 독특한 광경이 펼쳐졌다. 핫도그를 든 거인이 서 있었다. 로켓, 도구 등을 들고 있는 몇 명의 거인상도 보였다. 그런 광경에는 곧 익숙해졌다. 애틀랜타는 1955년 <백 투 더 퓨처>의 힐 밸리와 같았다. 단지 한층 조용할 따름이었다. 아름다운 새소리와 이따금 V8 픽업트럭의 폭음이 들렸다. 어디를 가나 미국의 배경음악은 V8 픽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싫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역사적’ 루트 66의 표지판이 더 나왔다. 미국이 바탕에 깔고 있는 가게들이 줄줄이 나왔고 더 많은 모텔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메카인 핑크 엘리펀트 앤티크 몰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거기에는 집채만한 비행접시가 있었다. 솔직히 집에 갖고 가고 싶었다.

우리 NSX는 일리노이 주 머플러 멘과 람 트럭의 기준으로 크기를 잘랐다

 

루트 66은 대도시 주변에 이르자 약간 혼란스러웠다. 세인트루이스는 미국 중심항이었다. 바다까지는 아직 1600km 이상 남아있었으나 미시시피 강폭은 바다처럼 넓었다. 오리지널 루트 66은 해마다 바뀌다가 고속도로에 자리를 넘겨줬다. 때로는 어느 해의 루트 66을 달리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었다. 따라서 자기 취향에 맞는 도로를 골라서 달릴 수도 있다. 포스웨이도 비슷하게 어디서 출발했는지 막연했다. 영국에서도 가장 가까운 실례를 찾을 수 있다. 영국에서는 성이 있는 도시가 솟아나 유명해진 이주용 도로가 있다. 미국에서는 ‘RV 데어 예트’(RV There Yet)라는 캠핑카 판매점을 소개하는 광고판이 서 있었다. 그리고 신기한 마을 우라누스(Uranus)가 눈길을 끌었다. 


“내가 보기에는 감탄할 만한 게 별로 없다.” 미주리 주 레바논의 어느 호텔 프런트를 지키던 카렌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녀는 레바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미주리 제3의 도시 스프링필드가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는 아주 훌륭한 자동차 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다. 여기서 일하고 있는 마이클은 NSX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차의 가장 놀라운 점은 사진기자 룩이 가져온 가방 4개가 모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스피드에 흠뻑 빠졌다. 게다가 전력만으로 시내에서 단거리를 조용히 달릴 수 있어 매력적이었다. 그들이 정체를 알든 말든 모두가 이 차를 사랑했다.

 

미국인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자동차문화가 부러웠다. 우리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이 우리 차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무도 우리를 ‘멍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딜 가든 재미있는 차를 몰고 가면 사람들이 에워쌌다. 캔자스는 루트 66과는 별로 인연이 없어 북쪽 18km를 지날 뿐이었다. 사진기자 룩은 오래된 아름다운 다리 꼭대기에 올라갔다. 나는 우회로가 생겨 일방통행이 된 도로구간에 가만히 서 있거나 후진하는 동작을 반복했다. 13만 파운드(약 1억9110만 원)짜리 슈퍼카로 말이다. 그때 이웃 제방도로를 경찰차가 지나갔고, 우리는 서로 손을 흔들었다. 미국 전역에서 그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있어 보이는 것은 결코 불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해지자. 우리가 백인이라는 사실도 한몫을 했다. 


유명한 루트 66의 랜드마크 캐딜락 랜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캐딜락 랜치는 아말릴로 부근의 땅속에 반쯤 묻힌 차 10대를 가리켰다. 미국에는 버려진 차가 엄청 많았다. 벌판에서 실제로 10대의 차를 봤지만 허리까지 땅속에 묻혔다는 게 이상할 뿐이었다. 원래 설치예술의 하나였으나 지금은 소비주의의 추한 무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약간 당혹스러워하는 수십 명의 부모들이 데려온 자녀가 사방을 뒤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천 개의 텅빈 스프레이 캔이 뒹굴고 있었다.

5150km. 미시건 주 메리스빌에서 출발하여 LA로 갈 때 정차나 탐사, 후진 등 길을 잃고 배회한 거리; 프라이어 기자는 영화를 놓쳐 아쉬웠을 터. 하지만 드라이브인 시네마와 네온을 밝힌 모텔이 루트 66의 옛날을 떠올렸다

 

이때쯤 거의 집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클레인에 가지도 못했다. 인터스테이트 I40과 그 부근은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길 양쪽에는 개인소유의 트레일러와 단독주택이 늘어섰다. 때로 미국인들은 조롱을 받는다. 여권을 가진 인구가 전체의 겨우 40%(영국은 83%)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디를 가나 장거리 비행을 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마라벨라까지 가는 데도 30파운드(약 4만4100원)로는 안 된다. 따라서 여가를 즐기려면 으레 RV, 4x4, 또는 광야에서 웃고 즐길 엔진을 달고 있는 픽업트럭을 마련해야 한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둘러볼 황무지는 얼마든지 있었다. 정확히 말해 모뉴먼트 밸리는 루트 66에 들어있지 않았다. 한데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 돌아볼 만했다. 루트 66보다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때까지 골동품 가게를 실컷 볼 수 있었다. 심지어 그랜드캐니언마저 끌어들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 뒤 라스베이거스로 올라갔다. 따라서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루트 66이 허물어졌다는 느낌이 줄어들었다. 볼 것이 더 많았다. 루트 66은 페트리파이드 포리스트를 직통으로 뚫고 들어갔다. 자세히 보면 버려진 전신주 대열 옆의 덤불에 작은 봉우리가 있었다. 어쨌든 이곳의 스타는 그 숲이었다.

 

 

 

오클라호마 주 카투사의 푸른 고래를 보기 위해서 굳이 페요테 높이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루트 66의 그 구간에서 설치미술의 하나로 땅에 반쯤 묻힌 캐딜락 10대가 있었다

 

한편 애리조나에는 시트그리브스 패스라는 도로 한 자락이 지나고 있었다. 적어도 그곳에서 나는 잠시 NSX를 수동모드로 바꿨다. 그곳은 영국 웨일스와 같았으나 기온이 더 높고 3G라는 게 다를 뿐이었다. 도로가 너무나 좋아 제한 시속 20마일(32km)을 지키는 드라이버는 아무도 없었다. 거의 직선코스 3200km를 달린 뒤라 모든 코너를 한곳에 몰아놓은 듯했다. 스티어링의 직진성은 실로 경이적이었다. 1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기어 시프트 패들이 스티어링이 아니라 칼럼에 달린 것을 눈치챘다. 마침내 이 물건 밑에 진짜 스포츠카 섀시가 깔렸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이 도로에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보냈다. 

30파운드(약 4만4100원). NSX의 59L 연료탱크를 가득 채운 기름값. 주유소가 많아 연료가 모자란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br>
30파운드(약 4만4100원). NSX의 59L 연료탱크를 가득 채운 기름값. 주유소가 많아 연료가 모자란다는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우리 행정은 오트맨으로 이어졌다. 거기서 130년 전 누군가 마케팅의 천재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자취를 목격했다. 아니면 천하제일의 고집불통이 있었다. 그곳은 130년 전과 똑같았다. 모든 게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제 그곳은 당나귀가 득실거렸고, 가게들은 예상했던 그대로의 물건을 팔고 있었다. 루트 66 명판, 번호판과 소방관을 기념하는 펜나이프가 있었다.
이제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다. 오트맨에서 캘리포니아까지는 비교적 짧은 거리였고, 루트 66다운 분위기가 사그러들기 시작했다. 이들 소도시들은 전성기에도 루트 66의 명성에 덜 기댔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따라서 표지판이 점차 줄기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루트 66은 로스앤젤레스에 들어가면서 쾅 한방을 터트리지 않고 조용히 시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선물가게, 주유소와 골동품가게를 지나 모뉴먼트 밸리를 7시간이나 달렸다. 고속 NSX가 돌파한 그 구간은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마천루를 지나면서 길은 산타모니카 블러바드를 향했다. 거기에 루트 66의 종점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에 없었다. 2년 전 산타모니카 부두로 자리를 옮겼다. 로스앤젤레스는 마케팅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고, 그래서 전통을 무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루트 66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고자 했던 것은 옳았다. 이 여행은 할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내 대답은 그렇다. 물론 다시 미국 횡단에 나선다면 다른 루트를 따라가고 싶다. 대신 루트 66은 출발점이나 종착점으로 삼을 수도 있다. 진짜 미국을 보고 싶을 때 이렇게 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는 마치 영국에서 본머스에서 헤일링 아일랜드와 보그너를 거친 뒤 잉글랜드를 모두 봤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 여행을 통해 미국의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가치를 지녔다. 

 

<NSX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

 

혼다는 오하이오 주 메리스빌에 대형 제조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그 안에서 하루에 800대가 넘는 어코드가 굴러 나온다. 그러나 바로 옆의 혼다 퍼포먼스 매뉴팩처링 센터는 겨우 8대의 NSX를 내보냈다. 예상보다 많은 공정이 자동화됐지만 작업은 꽤 까다롭다. 섀시는 로봇이 용접했고, 강철제 A필러와 일부 복합소재를 제외하고는 거의 알루미늄이었다. 보디 패널과 마찬가지로 페인트칠도 현장에서 했다. 그런 다음 보조장비, 전기장비와 실내를 짜 맞췄다.

 

이 과정에서 자동화작업은 거의 없었다. 엔진(좀 떨어진 곳에 혼다 엔진조립공장이 있었다)은 밑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보디 패널을 마지막으로 씌웠다. 사람이 직접 수작업으로 했다. 그런 다음 중량을 쟀고, 승차고와 코너 중량을 점검했다. 이후 다이노 테스트, 리그 테스트(도로에서 일어나는 잡음 시험)를 하고, 페인트작업/마감 검사를 했다.

 


<LA로 가는 고속도로>


루트 66은 시카고를 출발하여 유명한 팝송이 아름답게 묘사한 길을 따랐다. 세인트루이스와 미주리 주 조플린, 오클라호마시티를 거쳤다. 그런 도시가 노래만큼 아름다운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시카고를 출발하여 광활한 대평원 뉴멕시코, 텍사스, 애리조나를 쏜살같이 자르고 달렸다. 루트 66이 처음 지명됐을 때는 불과 약 1300km만이 포장을 마쳤다. 지금도 일부 비포장도로가 있다. 제대로 된 4x4나 바이크가 있다면 오프로드를 달리는 스릴을 맛볼 수 있다. NSX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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