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하가 만난 사람 /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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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하가 만난 사람 /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
  • 황순하 편집위원
  • 승인 2018.11.14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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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전영선 소장은 60여 년간 세상의 ‘탈 것’에 대한 모든 것을 모으는 수집가이며 역사가다. 가을이 깊어가는 여의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不狂不及(불광불급),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에 미쳐야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국내에서 자동차와 관련해 가장 많고 다양한 자료를 보유하고 있는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의 전영선 소장을 표현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이 있을까 싶다. 그는 한국전쟁 이후 미군들이 내다 버린 자동차잡지들을 보며 자동차에 빠져들었던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해, 60여 년간 뚝심과 열정으로 이 세상의 ‘탈 것’에 대한 정보를 계속 모아 지금에 이르렀다. 

 


단순히 자료만 많이 모아놓았다면 수집가일 뿐이지만, 전 소장은 오래된 자료들을 끊임없이 주제에 따라 날줄과 씨줄로 새로이 엮어 새로운 생명과 가치를 부여하는 역사가다. 또한 그 결과물을 저술과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일깨워주는 교육가이기도 하다. 1964년에는 그 동안 모았던 1200매 사진과 본인의 디자인 스케치 50점으로 세계 자동차발달사 전시회를 개최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미군 트럭의 섀시에 드럼통을 편 차체를 얹어 승용차와 버스를 만들던 시절의 일이다. 이는 사실상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관련 전시회로 여겨지고 있다. 

 


전 소장은 국내 제1호 자동차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당시 버스를 만들던 하동환자동차에 들어가 손과 줄자로 버스 디자인을 해 1964년과 1965년에 각각 브루나이와 베트남에 우리나라 최초로 자동차 수출을 가능케 했다(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제48회 무역의 날에 특별공로상으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후 신진자동차와 GM 코리아, 새한자동차, 동아자동차, 쌍용자동차를 거치며 디자인과 설계, 제조, 부품개발, 기획 등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1993년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세운 그는 자동차산업의 역사와 문화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국내 자동차산업의 하드웨어 성장을 현장 밑바닥부터 겪으며 독자적인 모델을 만들었고, 하드웨어 기반이 잡히자 소프트웨어의 제로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 특이한 커리어를 선택한 것이다.

 

전 소장이 25년째 쓰고 있는 여의도 오피스텔의 작은 연구소로 들어서니, 돋보기안경에 확대경까지 써가며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반갑게 웃으며 맞아준다. 편한 복장에 자그마한 체구지만 연륜을 뛰어넘는 강단과 의지가 느껴진다. 과거의 일들을 연월까지 정확히 기억하며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차분하지만 깐깐한 모습도 여전하다. 

 

전영선 소장은 과거의 일들을 연월까지  정확히 기억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우리 자동차 역사 이야기를 이어갔다

 

자동차와의 질긴 평생인연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일제시대 때 부친이 일본에서 주택건축을 하셨는데, 주 고객들이 부유한 상류층이라 3~4살 때부터 그들이 타고 온 자동차를 보면서 자랐다. 당시 유행하던 닷선(DATSUN) 경차를 아버지께서 구입해 신나게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때 자동차가 주는 재미에 입문한 셈이다. 해방 후 중학교 때는 미군들이 보다 버린 자동차잡지들을 보면서 자동차 구조와 디자인 공부를 했다. 수업시간에 공책에 자동차 그리다가 혼난 적도 여러 번이다.

 

당시 자동차잡지나 자료들이 다 영어로 써 있어서,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영어가 많이 쓰일 것 같아 영문학과에 갔다. 영어로 된 자동차 자료와 책에 몰두하면서 자동차 디자인에 빠졌는데, 욕심이 생겨 해외 주요 자동차업체들에 편지를 보내 각 브랜드의 첫 모델부터 현재 생산되는 모델까지 사진과 설명자료를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한 달 뒤부터 자료들이 다 왔다.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3학년 때 미국 캘리포니아의 아트센터 컬리지 오브 디자인(Art Center College of Design)에 지원했는데, 덜컥 입학 통지가 날아왔다. 뛸 듯이 기뻤지만 돈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 여러 장학재단을 찾아다녔는데, 다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 나라에서 산업기반도 없는 자동차 디자인을 공부해 뭐하냐며 거절했다. 그때 참 힘들었다. 그 당시 어떻게든 유학을 갔더라면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그래도 자동차가 좋아서 뭐라도 하고 싶었다.

 

신문사에 있는 선배에게 부탁해 광화문의 서울신문사 로비 전시실에서 각 브랜드에서 받은 사진과 자료를 정리해 세계 자동차발달사 전시회를 열었다. 자동차에 관련한 최초의 전시라 각 언론에서 큰 이슈가 되었고, 당시 자동차업계를 주도하던 하동환자동차의 하동환 회장과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회장도 다녀갔다. 졸업 후 김창원 회장이 불러서 부산의 신진자동차에 갔는데, 새나라를 카피한 신성호를 조립하고 있었다. 디자인을 따로 할 게 없었다. 그래서 4개월 만에 서울로 올라와서, 버스이긴 하지만 독자적 모델을 만들고 있던 구로동의 하동환자동차에 들어갔다.

 

자동차 메커니즘도 배우고 싶었고 돈을 모아서 유학도 가고 싶어서였다. 닛산 트럭의 섀시를 베이스로 버스 디자인을 했는데 그 버스 한 대가 1966년 브루나이에 처음으로 수출됐다. 그러고 나니 박정희 대통령도 관심을 보였다. 정부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한창 전쟁 중이던 베트남에 20대를 수출했다. 그때 부산항에 내려가 선적되는 버스를 보며 벅찬 가슴을 달랬던 기억이 있다.

 

국내외 자동차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 빼곡하다

 

자동차 입문 이야기를 물었는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역사가 술술 나온다. 그의 말은 담담하게 이어진다.   
1969년에 하동환자동차가 부실기업으로 정리되면서 부평의 신진자동차로 옮겼다. 그때도 일본 모델인 코로나와 퍼브리카를 조립할 때라 디자인 쪽은 별로 할 게 없었다. 시간이 남아서 자동차의 역사에 대해 혼자 자료를 모으고 공부를 했는데, 이게 아주 재미가 있었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분야였다. 나중에 신진자동차도 부실화되어 1972년 GM과 합작으로 GM 코리아가 되었다.

 

그런데 나는 공대도 안 나오고 디자인만 했다는 이유로 부산의 버스공장으로 밀려났다. 부산공장에서는 GM 계열사였던 일본 이스즈의 트럭 섀시로 버스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차체설계를 체계적으로 익혔다. 그 후 산업은행이 신진의 지분 50%를 인수해 만든 새한자동차에서 계속 근무했다. 1975년 내가 차체와 내부 디자인을 전부 한 리어엔진 버스가 시판됐고, 이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하동환 회장이 운영하던 동아자동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는데, 미국 장기연수를 시켜준다는 말에 넘어갔다.

 

당시 동아자동차가 평택으로 옮기면서 대규모 생산설비를 갖추고 버스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했다. 닛산 트럭 베이스였는데 근본적인 품질 문제가 엄청났다. 그걸 수리하느라 일 년 넘게 공장에서 숙식하며 고생했다. 그때 매일 작업 끝내고 밤에 마신 막걸리 양이 어마어마했다. 내 간은 그때 이미 다 망가졌다. 결국 미국 연수도 못 갔다.

 

전 소장의 인생 스토리는 봇물 터지듯 끊임없이 이어졌다. 고급 스포츠카 디자인을 꿈꾸던 열혈 청년이 시대와 주위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는 버스 디자인과 제작에 몰두할 때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자동차 역사연구에 더욱 몰두하지 않았을까? 1990년대 들어 현대와 기아에서 엑셀과 세피아 같은 독자모델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우리나라 자동차산업과 시장은 급성장을 시작했고, 전 국민이 자동차라는 물건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방송과 언론매체들은 자동차의 역사와 주요 브랜드의 성장 스토리, 선진국들의 교통문화 등에 대해 여러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 이런 요구에 대응할 수 있는 자료와 지식을 갖춘 사람은 전 소장 뿐이었다. 어떤 계기로 미디어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1985년에 동양방송에 다니던 친척 소개로 당시 유일한 스포츠연예 신문이었던 일간스포츠의 자동차 이야기 코너를 맡게 됐다. 자동차 디자이너 겸 연구가라는 타이틀로 자동차 개발과 제조의 뒷이야기를 7회에 걸쳐 썼는데, 제법 인기가 있어서 계속 연재하게 됐다. 그걸 보고 주간동아에서도 의뢰가 왔고 이후 여러 매체에서 줄줄이 원고 의뢰가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KBS 라디오의 ‘가로수를 누비며’의 고정 출연자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MBC 라디오의 ‘푸른 신호등’에도 나가게 됐다.

 

보람도 느끼고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대외활동 하는 걸 회사에서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 아무래도 회사 내부 이야기도 자꾸 하게 되니까. 1986년에 동아자동차가 쌍용그룹에 인수되면서 그때부터 컴퓨터로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됐다. 게다가 작업 자체를 해외 디자인회사에 맡기다보니 나처럼 손과 줄자로 디자인하는 사람은 더 이상 쓸모가 없게 됐다. 결국 정년을 일 년 앞두고 1993년에 회사를 나와 연구소를 차렸다.

 

차라리 속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더라. 눈치 안 보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 후 몇 년 동안 일주일에 라디오 방송 13개에 출연하고 매달 칼럼 20개씩 썼다. 책도 여러 권 냈다. 정말 바쁜 시간이었지만 속이 너무 편했다. 돈도 좀 모여서 좋은 자료도 충실하게 많이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출연 요청이 뚝 떨어졌다.

 

한국 교통 3000년사를 쓰기  위해 지금도 쉬지 않고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전 소장은 자료의 보존과 저술활동에 주력해왔다. 요즘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까? 
2007년 ‘세계 자동차디자인 120년사’라는 책을 내고 한동안 쉬었다. 이제 147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태엽동력 탈것부터 출발한 세계 자동차 600년사를 쓰고 있다. 그리고 고조선 초기부터 군사용으로 수레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그때부터 시작한 한국의 육해공 모든 탈것들을 망라한 한국교통 3000년사도 쓰고 있다. 자료는 충분히 있는데 체력도 떨어지고 눈도 침침해서 진도가 잘 안 나가는 게 문제다.

 

사무실을 꽉 채운 수많은 종류의 자료들은 과연 어떻게 다 모았을지 궁금했다. 모르긴 해도 수집을 하면서 힘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자료라는 게 비싸거나 대단한 게 아니라 우리 주위에 흔히 있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구하기 어려워지는 것들이다. 그런 걸 꾸준히 모아놓으면 자동차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귀한 사료가 된다. 1950년대에 모은 미국의 자동차잡지들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대학 시절 도서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해외 자동차자료를 많이 모았다. 지금도 세계 주요 브랜드들이 만들어내는 차종들의 사진을 계속 꾸준히 모으고 있다.

 

1967년 국내에서 자동차 카탈로그를 내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국내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들의 카탈로그와 오너 관리 매뉴얼 등을 모았고, 지금도 신차가 나오면 자동차영업소에 가서 몇 부씩 가져온다. 직장 동료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도 술 사주면서 많이 뺐었다. 1980년대부터는 일본과 호주로 출장 가서 책을 많이 사왔다. 국내에는 자동차의 역사와 각 브랜드들의 성장에 대한 책들이 별로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집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국내에는 참고할만한 자료가 정리된 게 거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도 100년이 넘어가는데 말이다. 오히려 일본자동차공업협회(JAMA)의 도서관에 일제시대 우리나라의 자동차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남아 있다. 원하면 다 복사를 해준다. 그래서 많이 가지고 왔다. 국회도서관에 가서 살다시피 하면서 일제시대의 국내 신문들을 다 뒤졌고, 자동차 관련 기사나 광고, 사설 등 좋은 사료들을 많이 발굴해냈다. 이런 자료들을 계속 발굴하고 연구하기 위해 후배들을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다들 역사는 돈이 안 된다고 싫어하더라.

 

60여 년간 모은 자료들로 가득한 사무실. 전 소장은 자동차산업 발전 공로로 2011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자료를 모은 기준과 방향,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자료는 무엇일까. 
유일한 기준은 역사적 의미다. 사람과 차, 브랜드의 세 가지 방향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거나 있을 것 같은 자료들을 집중적으로 모은다. 아무래도 인쇄 자료가 많지만, 사진이 역시 중요하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모았다. 자동차 사진은 아마 국내에서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자동차는 새로운 콘셉트로 인간의 삶을 혁신시킨 차, 그리고 새로운 기술로 자동차를 혁신시킨 차를 말한다.

 

즉, 비싼 슈퍼카가 아니라 소방차나 앰뷸런스, 지게차, 믹서트럭 같은 차들이다. 요즘 유행하는 푸드트럭도 그 기원은 미국 서부 개척시대까지 올라간다. 모두 자료가 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건 우리나라가 해외 차종들을 조립 생산하던 1960년대 차종들의 카탈로그다. 이 또한 전부 다 가지고 있다. 국내 자동차산업 초기를 연구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아마 그 차종을 만들었던 자동차업체도 안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동안 모았던 자료들을 40개 장르로 구분해놓은 파일들이다. 선반 위에 허름한 모습으로 꽂혀 있지만, 이걸 가지고 연구하면 박사학위 수십 개쯤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희귀한 책들에 대한 애착도 크다. 

 

이런 방대한 자료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물었다. 
자동차는 야누스의 얼굴 같은 존재다. 바퀴에서 시작해서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해준 문명의 이기지만, 사람의 감정과 나태로 인해 제대로 쓰이지 못하면 흉기가 되기도 한다. 자동차는 인류가 존재하는 한 함께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결코 흉기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자동차를 타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와이퍼 같은 작은 부품 하나에도 엄청난 개발의 역사가 있다.

 

그런 걸 알면 자동차에 애정을 느끼게 되고 함부로 다루지 않게 된다. 음주운전도 1902년 최초의 음주운전 사고부터 가르쳐야 제대로 예방이 된다. 실생활에서 자동차의 긍정적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자동차 문화시대를 이끌어가야 한다. 그래서 자료를 모아 공개하고 사람들에게 공부하라고 권하는 것이다. 대학의 자동차학과에서 기계로서의 자동차만 가르치고 기술개발만 독려해서는 안 된다.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

 

내가 올드카 복원 사업에 뛰어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2007년 국내 최초의 국산차인 시발을 삼성교통박물관과 함께 제대로 복원해냈다. 정말 보람이 컸다. 같은 해에 정부와 함께 근대 문화유산 자동차유물 조사에 참여했다. 포니와 경삼륜차 ‘T-300’을 포함한 올드카 6대를 문화재로 등록시킨 것도 기억에 남는다. 기계인 자동차가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JAF, 미국의 AAA, 독일의 ADEA 등 민간 자동차단체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역사를 가르치면서 건전한 자동차문화를 주도해가는 걸 벤치마킹해야 한다.

 

 

젊은 시절의 전영선 소장(왼쪽)과 그가 직접 디자인한 하동환 버스

 

역사 이야기를 듣다보니 자동차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궁금증이 생겼다. 바퀴를 단 ‘탈것’은 유사 이래 인류 문명을 어떻게 바꾸어놓았을까? 그리고 국내에서 바퀴문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바퀴는 인간 생활에서 대량수송과 시간절약을 가능케 했다. 로마의 예에서 보듯 바퀴를 더 일찍, 더 잘, 더 많이 쓴 나라가 역사적으로 주변 나라를 압도해왔다. 국내에서도 기원전 1000년경 고조선시대 초기에 수레를 군용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뒤를 이어 고구려와 발해가 넓은 국토를 방어하고 발전시킨 것도 사방에 길을 만들어 바퀴를 잘 썼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이후 중국과의 대립관계를 끝내고 상호 공존을 위한 조공관계가 계속 이어지면서, 문(文)을 숭상하고 적의 침입 시 빠른 진공을 막기 위해 도로 인프라를 후퇴시켰다. 우리나라의 바퀴문명이 정체된 것은 역사적으로 참 아쉬운 일이다.  

 

자동차의 세기로 불리는 21세기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인류 문화에서 탈것은 에너지원의 변화에 따라 발전해왔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말까지 증기기관을 이용했고, 다시 19세기 말 발명된 내연기관이 지금까지 사용되었다. 최근 새로운 동력원으로 대체되기 시작된 모습이다. 지금껏 대략 100년 정도의 사이클로 변환되어 왔다. 현 상황에서 친환경 에너지로는 ‘전기’가 대세라 향후 전기차가 상당부분 내연기관 차량을 대체할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전기차는 100년을 버티지 못하고 기껏해야 50~60년 정도 갈 것 같다. 메커니즘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부품도 많이 필요 없어서 메이커들이 돈을 벌기 쉽지 않다. 시장 경쟁에서 앞서나갈 여지도 많지 않다. 기술적 진입장벽이 낮아 군소 메이커들도 계속 달려들 것이다. 사실 기계가 복잡할수록 기존 대형메이커들이 돈을 더 많이 번다. 배터리도 계속 크기를 작게 하고 파워를 키워야 하는데 분명 한계가 있다. 수소 연료전지가 대안이 될 수 있는데 원가가 많이 내려야 한다. 핵에너지도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어느 에너지원도 내연기관을 완벽히 대체하지는 못하고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공존할 것이다.

 

품질과 기능이 상향평준화되면서 이제 디자인이 새로운 경쟁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바늘부터 우주선까지 다루는 산업디자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고, 과연 이것이 삶의 가치를 올려줄 수 있을까? 
우선 디자이너를 관둔지 너무 오래됐다. 그리고 나 같은 아날로그 디자이너는 최근의 첨단 디자인 셈법을 잘 모른다. 그래도 디자인을 정의해본다면 결국 물건의 꽃단장이다. 요새는 디자인 경쟁이 너무 심해져서인지 추상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 컴퓨터가 디자인도 하고 복잡한 형상도 다 만들어주니까.

 

그런데 우리 실생활에서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디자인이 바람직하다. 디자인이 너무 복잡해지면 망가지기도 쉽고 수리비도 많이 들어간다. 디자인이 시각적 아름다움을 통해 삶의 가치를 올려주지만, 너무 과도해지면 문제다. 피카소 그림 같은 디자인은 안 된다. 자동차는 매일 쓰는 소모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이 산업 디자인에 속하게 되면서 다른 제조물과 디자인 요소가 유사해지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자동차만의 디자인 특성이 옅어지니까. 자동차가 가구와 비슷해지고 있다.

 

향후 국내 자동차산업 지형은 어떻게 변화할지 혜안이 궁금하다. 
국내 자동차산업은 이대로 가면 영국처럼 될 것 같다. 개방경제 시대에 순수 국적 브랜드라고 애국심에 호소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디자인과 기술, 가격 같은 자동차 자체의 매력으로 승부해야 한다. 기술은 평준화되고 수입차의 가격은 점점 더 내려갈 것이 분명하다. 디자인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보지 않는다. 이대로 가면 국내시장에서 수입차의 비율이 40%를 넘어가는 건 시간문제다.

 

저가의 실용적 시장에는 중국산 차들이 몰려올 것이다. 그래도 어느 브랜드든 자국시장에서의 기반이 확고해야 장기 성장을 할 수 있다. 국내 자동차회사는 어떻게 국내 소비자들의 마음을 잡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단순히 차만 팔고 수리해주는 차원을 벗어나 자동차문화를 선도하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사회적인 기업이 먼저 되고 나서 기술에 집중해야 한다.

 

자동차업계의 대선배로서 자동차 커리어를 꿈꾸거나 현재 자동차업계에 있는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을까? 
자동차 역사를 먼저 배워야 한다. 자동차의 여러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관련 역사와 거쳐 간 인물들의 이야기를 배우면 꿈이 생긴다. 그리고 생각이 맑아지면서 자기가 자동차산업 내에서 어느 쪽 커리어를 택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자동차를 알고 좋아해야 한다.

 


한 나라의 자동차문화 수준을 알 수 있는 기준으로 모터쇼와 모터스포츠, 그리고 자동차박물관을 꼽는다. 우리나라도 이 세 가지 기준을 다 갖추긴 했지만 아직 성숙 단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자동차 생산에서는 단연 강국이지만 자동차 문화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불균형이 문제다. ‘자동차를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다 즐겁고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자동차문화의 시대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인터뷰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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