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장소의 몫이라면 추억은 사람의 몫이 아닐까. 사람이라는 대상은 가끔 다른 것으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 그것은 대부분 자동차가 된다. 지난해 10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만났던 포르쉐 카이엔 S 디젤을 2월의 서울에서 다시 만나는 감회는 그러한 기억과 추억이 교차하는 경험이 되었다.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비단 느낌뿐일까. 오늘 여기서 만나는 카이엔 S 디젤이 어떤 느낌을 줄지 궁금한 이유다.
여러 타입의 카이엔을 만날 때마다 같지만 다른 특성을 발견한다. 어쩌면 촉수를 세우고 발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러 명의 여자를 동시에 만날 때처럼… 그러면 카이엔은 도대체 몇 가지 모델이 있는 걸까. 이참에 한번 짚어보자면 기본 모델이 V6 300마력의 여자 1호. 여자 2호는 V6 245마력 디젤, 여자 3호가 V8 400마력의 카이엔 S다. 중성의 매력을 지닌 4호는 380마력의 하이브리드 S. 여자 5호는 V8 420마력의 GTS. 그리고 마지막 6호가 V8 500마력의 터보다.
그런데 여자 6호가 마지막이 아니었으니 카이엔촌에 여자 7호 V8 382마력의 S 디젤과 여자 8호 V8 550마력의 터보 S가 새로 입성한 것이다. 어쨌든 오늘 탐색할 데이트 상대는 여자 7호. 포르쉐 최초의 디젤 8기통 엔진을 얹은 모델이다. 옷맵시는 거기서 거기지만 V8 4.2L 바이터보 382마력 디젤 엔진은 0→시속 100km 가속 5.7초에 최고시속 252km라는 깐깐한 ‘스펙’을 자랑한다. 게다가 요즘 대세인 디젤을 무기로 연비 10.0km/L라는 실탄까지 갖추어 최고 잘나가는 인기녀임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시프트 패들을 이용한 변속도 괜찮지만 플로어의 자동 8단 팁트로닉은 고유의 손맛이 있어 더 좋다. 그리고 대개의 8단 팁트로닉 S 변속기는 6단에서 최고속도가 가능하지만 카이엔 S 디젤은 8단에서만 가능하게 세팅되었다는 것이 차별점이다. 스포트 모드로 옮기면 곧 박력 모드로 변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시프트업 포인트가 고회전역으로 옮겨가면서 배기음의 음향도 한층 스포티해진다. 가속의 질감이 거칠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운전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는다.
서해의 바람은 차가웠고 바다에 나가지 않은 빈 배들이 햇볕을 쬐고 있었다. 어쩐지 쓸쓸한 풍경은 그라츠와 서해가 다르지 않았다. 다시 운전석에 앉는 순간 그 쓸쓸함이 사라져버린 것도 공통점이 아닐까. 다음날은 북쪽으로 파주에 갔다. 때마침 올겨울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 자연스레 네바퀴굴림의 진가를 확인한다. 갑자기 눈이 쌓인 도로는 앞차가 길을 낸 곳으로만 차들이 달렸다. 아무도 가지 않은 한 개의 차선은 그대로 눈이 쌓여갔다. 카이엔이 그 길을 외면할 리는 없다. 정체가 심해져가는 도로에서 카이엔은 저 홀로 눈길을 헤치면서 세차게 달려 나갔다. 사이드 미러 속으로 몇 대의 차들이 따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글: 최주식, 사진: 김동균 기자
Porsche Cayenne S Diesel
가격: 1억870만원
크기(길이×너비×높이): 4846×1939×1705mm
휠베이스: 2895mm
엔진: V8, 4134cc
최고출력: 382마력/3750rpm
최대토크: 86.7kg·m/2000~2750rpm
0→시속 100km 가속: 5.7초
복합연비: 10.0km/L
CO2 배출량: 203g/km
변속기: 자동 8단(팁트로닉 S)
서스펜션(앞/뒤): 더블 위시본/ 멀티링크
브레이크: (앞,뒤 모두) V디스크
타이어: (앞,뒤 모두) 255/55 R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