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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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혜의 영화와 자동차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 아이오토카
  • 승인 2011.05.02 0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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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된 공간, 함축된 언어, 그 속의 관계

하루 종일 세차게 비가 내린다. 빗소리 때문일까, 짐을 정리하고 싸는 일에 진척이 없다. 아니면, 빗소리 때문에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져 속도를 낼 이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아침부터 시작된 짐싸기는 오후 들어서도 도무지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두 사람의 지난 5년간의 결혼생활의 자취들이 여기저기 묻어있는, 이를테면 남자가 만들어준 인형이랄지, 함께 연구하고 공부하며 치열하게 펼쳐보았던 파스타 요리책이랄지, 예뻐서 사놓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앤틱 식기랄지 등등이 자꾸만 눈에 뜨이고 손에 잡혀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야하는 손길을 멈칫 멈칫하게 만들고 있다.

여자는 오늘, 집을 나갈 예정이다. 다른 남자를 사귀게 되었고 그 남자와 함께 살고 싶고 그래서 이별을 통보하고 마침내 오늘, 집을 나가기로 하고 짐을 싸고 있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왜냐고 화를 내지도 않고 그럴 수는 없다고 울부짖지도 않으며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지도 않는다. 그저 여자의 결정을 받아들였고 오늘, 외식을 하자며 레스토랑에 예약까지 해놓았다. 남자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는 그 여자와 남자의 하루를 담고 있다. 출장 가는 아내를 공항에 데려다주는 차에서의 대화 이후 여자가 나가는 날, 그들의 집에서의 하루를 담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간과 기억, 생활이 배어있는 집안 구석구석을 비추며 두 사람의 이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별마저도 마치 일상의 일부인 양 그렇게 진행된다. 주룩주룩 하루 종일 비가 내리고 TV에서는 축구를 보여주고 들이치는 비를 맞으며 삐걱거리는 창문을 닫고 커피를 마시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러다가 아기 고양이 한 마리가 길을 잃고 집으로 들어오고 잠시 후 고양이의 주인인 이웃부부가 들어선다. 이웃부부는 탐색하듯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곤 가버리고 그리고 고양이가 삐죽 얼굴을 내민다. 그 고양이에게 먹을 것을 주며 여자는 중얼거린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이노우에 아레노의 단편 <돌아올 수 없는 고양이>가 원작인 영화. <여자, 정혜>, <멋진 하루> 등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이 깊은 감상을 길어 올리던 이윤기 감독이 연출한 영화. 영화는 미니멀리즘을 지향한다. 공간이라고는 오직 여자가 남자에게 이별을 통보하던 날의 자동차 안과 짐을 싸는 날의 두 사람의 집. 출장 가는 아내를 공항에 데려다주면서 집을 나가겠다는 아내의 말을 듣게 되는 남자의 공간인 자동차는 르노삼성자동차의 SM3.

그 차는 어쩌면 5년 동안 함께 울고 웃으며 사랑하고 다투며 지내온 두 사람과 함께 많은 곳을 다녔을지도 모른다. 그 차는 어쩌면 출장이 잦은 아내를 배웅하고 마중하는 남자의 기다림과 설렘을 여기저기 묻히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차는 어쩌면 두 사람이 소곤거리고 큰소리로 외치는 소리들을 다 들어주고 묻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공간이 지금은 이별이라는, 쉽지 않은 통보를 하고 받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툭 터진 공간에서, 아니면 자동차가 아닌 조금은 더 넓은 공간이라면 그 울림이, 그 쓰라림이 조금을 덜하지 않았을까.

운전을 하는 한계상황, 더 확장될 수 없는 한정된 공간. 그곳에서 단 두 사람이 있는 그곳에서 이별하자고 말하는 여자와 이별을 받아들이는 남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큰 내색이 없다고 큰 반응이 없다고 큰소리가 아니라고 그것의 파장이 작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이별을 내뱉은 여자와 받아들인 남자는, 그저 그것으로 이전과 이후의 시간을, 이전과 이후의 관계를, 이전과 이후의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

‘결정난 일은 절대로 뒤집을 수 없는 걸까? 안즈는 문득, 아프도록, 그렇게 생각한다. 뒤집을 수 없다는, 그런 무서운 일이 과연 현실이 되는 걸까?’ 소설의 한 구절을 되뇌어본다.

글 · 신지혜 (아나운서, CBS-FM <신지혜의 영화음악> 제작 및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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